김교신이 양정학교 교단에 설 무렵 조선의 학원은 사회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첫 담임 반 학생들이 4, 5학년이 되던 1931년과 1932년 사이 사회주의 열풍은 가장 거셌다. 이 무렵 학생들의 동맹휴학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도 있지만, 사회주의를 내세워 교사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한 것은 정당화될 수 없었다. <성서조선> 1931년 4월호 '성서통신'은 이러한 사정을 전한다.
[1931년 2월 15일] 근래에 자신의 괴로움과 주위의 고적함을 느끼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내가 위로를 요구하려던 주위의 형제들을 돌아볼 때 저들이 더 어려운 환난 중에서 고통함을 보고는 나는 감히 요구할 바를 제의치 못할 뿐인가, 도리어 나아가 위로하여야 할 형세로 된다. 신약(身弱)과 친환(親患)에 괴로운 자, 실직에 괴로운 자, 급격한 생도의 변혁에 못 견디는 자도 있고 충실한 교사로서 예수 이름 연고로 침 뱉음을 당하는 선생도 있다. 그중에는 또한 중학교 생도로서 동맹휴학에 불참하고 신앙에 서서 싸우느라고 고통 중에 있는 어린 형제도 있다.
김교신 전집 5, 42-43쪽
선천 신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양인성은 1932년 여름 신성학교를 사직했다. 학생들의 동맹휴학 때문이었다. 1932년 6월 3일 동아일보 기사는 신의주고보 학생이었던 박병상 등의 동맹휴학 사건을 보도했는데, 이에 따르면 박병상 등이 신성학교와 오산학교 학생들과 연대하여 동맹휴학을 일으키기로 계획했고, 등사기로 격문을 만들어 배포한 후 5월 5일 오전 10시에 붉은 기를 들고 곤봉과 단도 등으로 반대하는 학생들과 직원을 난타했다. 양인성의 신성학교 사직은 이 사건 직후의 일이었다. 양인성은 경성에서 직장을 구했으나 실패하고 개성 호수돈여학교로 부임해 갔다.
함석헌이 있던 오산학교에도 동맹휴학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사회주의 학생들이 민족주의 진영의 교사들을 폭행하는 일이 일어났고 함석헌도 그 대상이 되었다. 교사들이 대부분 미리 도망갔지만 함석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하지도 않은 채 얼굴을 가리고 학생들의 매를 맞았다. 1932년 2월 함석헌은 김교신에게 편지를 보내와 “루비콘강을 건넜다”라고 했고, 1933년 오산을 떠날 결심을 전해오기도 했는데, 이 역시 당시 오산의 분위기와 관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맹휴학은 학생들을 둘로 나누었다.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학생들과 가담하지 않는 학생들 사이에 반목이 일어났다. 김교신의 일기가 전하는 “중학교 생도”, 즉 동맹휴학에 불참하고 신앙의 싸움을 한 이는 류달영이었던 것 같다. 학생들의 반목은 류달영이 졸업을 앞둔 시점까지 이어져서 졸업식에 불참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김교신은 류달영에게 졸업생 답사를 맡기기로 했으니 학생으로서 마지막 의무를 다하라는 말로 참여를 종용했다.
김교신은 동맹휴학에 나선 학생들에 맞섰다. 1931년 4월 '성서통신' 면에 김교신이 육필로 쓴 기록을 덧붙여 놓고 있어 눈길을 끈다. 위의 1931년 2월 15일 일기에 이어지게 덧붙인 이 기록은 학생들의 동맹휴학 움직임에 맞선 김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에는 상상키도 어렵게 맹렬한 사회주의 청년들 맹동이다. 저들은 나에게 백지 답안과 맹휴의 주장을 강요하다. 근일에도 약 3시간 약 백 명의 폭한들과 싸우다 단신으로 싸우는 용기는 스스로 비상(?)함을 느끼다. 드디어 동맹휴학은 나로 하여 중지되다.” (김교신 전집 5, 43쪽)
김교신이 머리를 삭발한 것도 이 무렵 학원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1932년 3월 29일의 '일보'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함과, 학생들 심리를 위하여” 단발했다고 쓰고 있다. 머리를 짧게 깎는 데 대해 당시 학생들의 불만이 큰 것을 보고, 교사가 스스로 삭발하기까지 했으니 학생들로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32년 말 김교신은 학교를 떠날 결심을 굳혔다. 이 결심의 이유를 분명히 쓰고 있지 않지만, 사회주의로 인해 교육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 2월 김교신은 고민 끝에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교무주임이었던 서봉훈의 간곡한 만류로 사직의 뜻을 거두었다. 서봉훈이 어떤 말로 만류했는지 그래서 김교신이 뜻을 돌이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동맹휴학 움직임을 홀로 막아선 일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1933년 4월 새로운 학생들이 입학했고 김교신은 두 번째 담임을 맡게 되었다. 이날 김교신은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담임으로서 일장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의 요지는 1933년 4월 4일을 기록한 '통신'에 드러나 있다. 이 연설에서 김교신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배우려는 태도를 버리게 될까 경계하고 또 경고했다.
“끝으로 할 말씀은 이 어린 생도들의 천진한 자태를 보니 그 눈동자에는 배우려는 동경, 경모, 순복, 소박하나 심정 등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탄스러운 사실은 이 천사 같은 생도들도 그 대다수는 불과 수년에 차마 볼 수 없는 악당으로 화(化)하고 맙니다. 배우려는 태도에서 비판하려는 태도로 될 때에 생도로서는 볼일 다 본 것으로 아시오. 신식 교육이라 하여 별수 있는 듯이 떠드나 우리는 한마디로 하면 구식이요, 독서 백 번에 뜻이 저절로 통하는 것이요, 땀에 의복이 썩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며, 파괴보다 건설주의요, 상해나 시베리아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 서울서 조선총독부 법령하에서 하는 일이요, 무책임한 공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교육을 하는 것이요, 무리한 주문은 당초부터 사절합니다.” (김교신 전집 5, 121쪽)
김교신은 학생들의 의기를 높이 샀지만,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진실함을 버리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하물며 교사를 상대로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조선을 세우는 일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파괴가 아니라 더 깊은 기초를 세우는 일이어야 했다. 그것은 무책임한 공상이 아니라 땀에 옷이 썩도록 노력하는 데서 출발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