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한 바울 신학
칼라 스워퍼드 워크 지음
오현미 옮김
솔직히 말하면, 저도 어떤 본문은 설교 본문으로 쉽게 선택하지 못합니다.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 노예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말. 바울의 편지 중에는 선뜻 강단에 올리기 어려운 본문들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공공연하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좋은데 바울은 불편하다.” 목회자인 저 역시 그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자신 있게 반박하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칼라 스워퍼드 워크스 박사도 비슷한 자리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한 바울 신학은 시작합니다. 예일 대학교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바울 서신을 연구하고, 현재 웨슬리 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며 학장으로 섬기고 있는 그가 강의실에서 마주한 것은 단순한 학문적 의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서신의 해석으로 깊이 상처받은 학생들의 얼굴이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에게서 지워온 것
워크스 박사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 신학이나 바울의 윤리를 다루는 책들 중 이 사도가 가난한 자, 주변인, 예속된 사람, 잊힌 사람, 간단히 말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염려했다는 점에 관심을 보이는 책은 거의 없다”(19쪽). 그동안 바울은 교회론, 구원론, 기독론, 종말론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다루어져 왔고, 그 사이에서 바울이 살았던 현장—가난한 자들, 노예들, 여성들이 가득했던 1세기 교회—은 조용히 지워졌습니다.
한국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목회자들이 바울을 주로 교리를 설명하거나 교회 질서를 말할 때 인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실제로 누구와 함께 살았는지, 누구를 향해 복음을 전했는지는 충분히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교회에는 누가 있었는가?
저자는 먼저 바울 공동체의 사회적 모습을 꼼꼼하게 재구성합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제국 시대에 좋은 소식이 필요한 사람들, 즉 최저 생계 수준에 가깝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바울은 서로를 돌보라고, 서로의 짐을 지라고,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라고 신자들에게 말한다”(68쪽). 공동체 안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도 있었지만, 장사를 하거나 노예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바울 자신 역시 천막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귀족들이 천하게 여기던 일을 했던 사람이기에, 그는 사회의 밑바닥에 살아가는 이들과 눈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바울 서신에서 노예에 관한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바울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 문제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 것은 단순히 노예를 돌려보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소유물이 아니라 교회의 사랑받는 일원이고, 그래서 그의 행복을 모두의 관심사로 제시한다”(94쪽). 소유물을 형제로 부르는 이 선언이 당시 사회에서 얼마나 충격적인 말이었는지,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갑니다.
이 책의 제3장에서 다루는 여성의 문제는 더욱 논쟁적입니다.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 머리 가리기, 복종에 관한 본문들을 저자는 1세기 문화 속에서 다시 읽어 냅니다. 바울은 당시의 사회 규범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규범 안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여성의 존엄을 끌어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부부의 권한을 양쪽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한 바울의 말은,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로 보던 로마 사회에서 결코 평범한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된 바울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부분은 바울의 삶을 다루는 대목입니다. 그는 천막을 짜며 생계를 이어갔고, 감옥에 갇혔으며, 굶주리고 돌에 맞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자랑하는 사도였지만, 또한 자신의 고난을 자랑하는 사도였습니다(257쪽). 그가 “나는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그는 스스로 노동을 택했고, 그 선택은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복음을 전할 자유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고전 15:9). 박해자였던 자신의 과거를 한 번도 잊지 않았던 바울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면서 스스로 지극히 작은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타인의 결핍을 고려하고, 타인의 복락을 위해 자기 지위를 기꺼이 포기하면서 지극히 작은 자와 연대하는 모습을 닮는다”(292쪽).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
이 책을 읽는 내내 우리 교회를 떠올렸습니다. 흰여울교회에는 시각 장애인 성도들이 함께 예배합니다. 그분들을 바라보며 저는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바울의 복음이 이분들의 삶 속에 실제로 스며들어 있는가? 이 책은 그 질문을 더 깊고, 더 넓게 만듭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많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세속주의가 스며들면서 우리는 소수보다 다수에, 약자보다 더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가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편안한 자리에서 안주하려고 합니다.
결국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거나 비판하고, 지역 사회에 교회가 들어오는 것을 꺼리고 때로는 거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개척 교회나 약자들을 위한 교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혐오 시설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성경 안에서 다시 물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사도로 부름 받으면서 자신이 이전에 누리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남들이 꺼리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복음이 그의 삶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과 교회 공동체 안에는 ‘지극히 작은 자’가 존재하는가? 그들은 단순히 돕는 대상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인가?
이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바로 그 불편함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 불편함은, 오늘의 한국 교회가 왜 사회로부터 외면받게 되었는지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일지도 모릅니다.
